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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What!) 『3』

Band What/The Open Music, 2009. 12.


진실과 미학의 연결고리에서

  먼저, 우리가 흔히 착각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로부터 얘기를 시작하자. 그것은 우리가 음반을 통해 듣게 되는 것은 밴드의 연주 자체가 아니라 녹음, 편집으로 재구성된 소리라는 점이다. 흔히 록의 힘은 순수하게 밴드가 곡을 만들고 연주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록 음반(록 자체가 아니라)을 통해 우리가 듣는 것은 록 음악 자체와 조금 다르다. 이것은 단지 녹음되고, 조정된 소리일 뿐이다. 즉, 록은 연주되는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고, 록의 순간을 기록한 듯 보이는 음반은 그 순간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든 허구의 기록이다. 어쩌면 록은 무대와 리허설 룸에서만 존재하고, 녹음실에는 존재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녹음 결과가 연주자의 능력과 반드시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밴드의 연주라도 어떤 기술을 가진 어떤 기사가 어떤 스튜디오에서 어떤 장비로 녹음하고, 다시 이를 어떤 기술을 가진 어떤 기사가 어떤 스튜디오에서 어떤 장비로 믹싱하고, 마찬가지로 마스터링 하는가에 따라 음반에서 듣게 되는 소리는 완전히 달라진다. 테오도어 그래칙(Theodore Gracyk)이란 음악학자는 그래서 록의 미학을 새롭게 정의할 것을 주문한다.


  사실 그래칙의 스튜디오 미학에 대한 지적은 분명 맞다. 우리는 록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노래에 대한 좋고 나쁨을 작곡이나 연주에 의해 판단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귀는 참 간사하다. 실상 노래의 호오를 판단하는 첫 인상의 대부분은 녹음(이후 녹음은 믹싱, 마스터링까지의 과정 모두를 포함한다)된 소리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음반에서 들리는 연주의 음색만으로도 우리는 어떤 노래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음악을 듣다보면 가끔씩 곡도 좋고 연주도 잘 하는데도 이상하게 뭔가 답답하고 맘에 차지 않았던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뿌옇고 묘한 기분의 7, 8할은 보통 (녹음된) 소리 때문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한 음반을 들으며 선명한 음질로 듣고 있다고 우리가 느끼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리마스터링은 재녹음도 리믹싱도 아니고 단지 최종적 볼륨만 세부 조정하는 것뿐임에도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렇게 천지차이다. 물론 인간의 귀는 또 훈육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 알 수 없는 답답한 녹음 상태 사이로 ‘원래 연주되었을 상황’이라고 상상되어지는 연주의 흔적을 쫓기도, 찾아내기 한다. 이 과정에서 동영상이건, 클럽에서 보았던 라이브 연주건, 그 밴드가 실연하는 것에 대한 기억이 녹음-조정 과정서 잃어버린 소리까지 이미지로 재구성 해 낼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록 음반의 미학이 녹음을 통해 구성된 소리라 하더라도 나는 심정적으로, 록의 진정성은 밴드의 리허설 과정과 연주자 사이의 공감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조정된 녹음 결과라도 행간에 그 진실은 묻어난다고 믿는다. 순진한 꿈일지라도 말이다. 꿈과 현실 사이를 드러내는 일이 슬프게도 내가 하는 평론이란 행위다. 현실을 냉엄하게 바라보고, 그 안에 숨은 꿈의 영역까지 탐색하되, 꿈 때문에 결과물 자체를 포장하지 않는 일. 밴드 왓!(What!)은 분명 세 번째 정규앨범에 분노와 절박한 심정을 담아내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다. 녹음을 통해 만들어지는 록의 미학에 비춰볼 때, 아티스트의 절박함을 표현하기 위해 절박한 물리적 상황에서 녹음한다고 그 정서가 청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깟 미학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겠지만, 슬레이어(Slayer)의 음악을 듣고 청자들이 움찔하는 것은 밴드가 연주하는 소리를 청자의 오디오 기계와 고막이 견뎌낼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마치 끝장을 보려는 듯 날카롭고 무겁게 느껴지도록 치밀하게 계산, 고민한 프로듀서의 녹음기술로 재현된 미(美)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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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의 『3』앨범은 데뷔 EP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세 멤버, 보컬 몇 기타의 이상훈, 드럼의 신동현, 베이스의 장민규에 새로운 기타리스트 정세응의 라인업으로 녹음되었다. 밴드의 삐뚤어진 세상에 대한 분노와 반골기질은 앨범이 쌓여갈수록 점점 더 확대되는 것 같다. “Hey Man~ 촛불에 외쳐진 / Hey Man~ 소리를 들어라” “몰아치는 군중들에 물총놀이 / 화염 방패 연장, 피에 물총놀이”(「Hey Man」), “떨리는 손가락 유서 아래 남겨진 진실은 새까만 손”(「검은 그림자」), “힘없는 약자를 밟으려는~ / 칼날을 안든 범죄자야 수렁에 빠져 버린 자야 / 파탄에 눈물 흘릴거야” (「두 얼굴」) 거친 댓구의 문장이 성긴 운율을 느끼게 하는 가사에는 서슬 퍼런 분노의 기운이 살아있다. 이상훈이 가사에 자주 사용하는 “돼지”, “황태자”, “권력”, “약자”, “타락” 등의 단어가 이번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아무래도 야구선수 시절 언론에 비쳐지던 이상훈의 반골 기질은 이미지가 아니라 진짜로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던 듯싶다.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 앨범 속 가사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일반론적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앨범의 가사는 밴드가 곡을 만들고 녹음을 한 2008~9년 사이, 밴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닥뜨린 한국 현실에 대한 날 것의 분노다. 직설적이다 못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가사의 내용이 어색하기는커녕 가슴에 저릿하게 전달된다.


  연주 자체로 시선을 돌려보면 하드록의 정석에 가깝다. 왓!은 초기에는 크리드(Creed)와 같은 멜로디가 강조된 포스트-그런지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받은 듯 보였는데, 점차 그런지의 조상격인 하드록, 초기 헤비메탈의 원초적인 형태로 진화(?!)해왔다. 직선적인 악곡과 질감 역시 악기별로 녹음한 것이 아니라 밴드의 스튜디오(라고 쓰고 합주실이라고 읽는다)에서 원테이크로 진행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인지 곡의 구성이나 리프는 단순하지만 단단한 집중력이 느껴진다. 이상훈이 구원투수로 등판할 때, 김바다 보컬-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틀곤 했다는 사실도 이런 심증을 더했겠지만, 악곡에도 간간히 5집 이후의 시나위의 느낌이 묻어있다. 당시 시나위의 드러머이자 신대철과 음악적 교감에서 최고조를 보였던 신동현이 작곡한 「슬픈 나무의 향기」는 마치 「죽은 나무」의 제 3편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신동현의 연주는 이미 시나위 시절부터 묵직한 리듬 위에 날카로운 크래쉬와 스플래쉬, 라이드 터치로 쇳소리의 맛을 제대로 낼 줄 아는 드러밍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기본적으로 타미 리(Tommy Lee)와 같은 계열이라 할 수 있는 테크닉보다 지구력이 뛰어난 드러머인데, 특징적인 심벌웍을 추가해 누가 들어도 ‘신동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스타일을 구축했다. 「미친 개들의 싸움」,「물고기의 입맞춤」등에서 예의 힘과 개성을 모두 챙긴 연주가 한껏 드러난다. 테크니션은 늘어났지만 자신만의 개성으로 뭉친 드러머 찾기가 오히려 힘들어진 한국 음악판에서 그의 연주는 단연 빛난다. 그러나 연주를 담아낸 녹음은 대단히 열악하다. 둔탁하게 묻혀버리는 킥과 플로우 탐 소리, 그리고 스네어와 탐탐 음량 사이의 균형이 다소 무너진 녹음 상태는 원래 연주가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뛰어난 포웨이(4way)의 안정감을 여지없이 가려버린다. 물론 집중해서 듣는다면 숨겨진 연주를 포착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록 음반을 공연장과 같은 충분한 출력으로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녹음이 할 일은 공연장에 비해 형편없이 열악한 개인들의 플레이어에서도 최대한 근사치라고 ‘믿을 법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이상훈과 정세응의 리프 역시 록의 본령이다. 육감적인 펜타토닉에 입각한 리프와 블루지하면서도 날카롭게 빠지는 기타 솔로를 뿜어내는 정세응의 연주는 1집『What?』에서 기타를 담당했던 한기택 이후 밴드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리프 메이커이기도 한 이상훈은 묵직하고 입자가 성근 톤을 선호한다. 이는 지난 앨범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러한 하드록 스타일 리프를 얼마나 생생하게 잘 담아(녹음할)낼 수 있는가에 록 음악 녹음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선  기타리스트 스스로 자신의 톤을 스튜디오 상황에서도 요령껏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아니면 기타리스트가 선호하는 톤의 질감을 어떻게 녹음으로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진 녹음 기사를 만나야 한다. 이 앨범의 가능성은 두 가지다. 밴드가 원한 기타 사운드 자체가 (심하게)둔탁한 리프와 날카로운 기타 솔로였을 가능성 하나와 『What?』앨범과 비슷한 둥글게 뭉쳐지는 톤의 리프와 이를 잘라내는 듯 날카로운 기타 솔로 톤을 원했으나 리프 녹음 과정에서 저음의 입자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진실은 밴드만이 알 것이지만, 멤버들의 손으로 홈레코딩 방식으로 제작한 앨범이 녹음 장비나 기술이 완전치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미친 개들의 싸움」에서 기타 리프의 브레이크를 베이스 연주가 치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Panic」같은 곡의 기타솔로가 양껏 펼치기 위해서는 이를 받치는 베이스의 움직임이 살아나야 한다. 무대 위라면 장민규와 정세응의 연주는 불꽃을 튀기며 자신의 실력을 뽐냈을 것이다. 그러나 녹음의 과정은 무대 위와 비슷하게 사운드의 공간감과 질감을 흉내 내는 것이지, 반드시 두 연주자가 함께 연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녹음실에서 펼쳐진 베이스의 활약은 다른 파트와의 소리 배치 과정(믹싱)에서 지분을 잃고 말았다. 록 음악에 충분히 귀가 단련된 청자라면, 왜곡된 소리의 굴곡를 메우며 상상할 순 있다. 하지만, 밴드는 청자에게 그런 요구 할 권리가 없다. 믹싱 과정에서 밸런스를 잃은 소리까지 청자가 머리 속에서 조절해가며 록 음반을 들어야 할 의무는 없다.


  일취월장한 이상훈의 보컬라인을 만드는 솜씨를 생각한다면, 밴드 왓!의 녹음은 더더욱 안타까워진다. 과거 「돼지의 꿈」이나 「널보며...」같은 슬로우 템포의 곡에서 그의 보컬라인은 기성 가요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위 ‘뽕끼’가 담긴 그 노래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상훈만의 무엇이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스타일의「Panic」이나, 과거 같으면 내지르기 바빴을「물고기의 입맞춤」에서 완급을 조절하며 내뱉는 능력, 심지어 「재앙」(이 곡의 메인 리프는 분명 블랙새버드(Black Sabbath)의 「Sweet Leaf」의 영향 하에 있다)과 같은 몰아치는 곡에서의 다양한 표정의 목소리 연기까지 놀랍도록 자기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내지를 때도, 날카롭고 독특한 액센트를 넣으며 그만의 매력을 창조한다. 기타 솔로가 날카로운 것 역시 이상훈 특유의 툭툭 찝어대는 보컬에 화답하는 것이리라.


  고도 자본주의 시대로 흘러가며, 개인의 자유는 구매의 자유로 슬그머니 축소되고 있다. 개인의 가치가 물건으로 대치되는 이 시대에 분노하는 음악이 록이다. 그래서인지 록은 저항의 음악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 록이 지난 60여년 만들어 낸 미학은 매우 자본주의적이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가공할 기타 연주는 당대 최고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숙련된 녹음기술자가 엄청나게 고민한 끝에 매우 세심하게 녹음되었다. 불타오르는 그의 연주는 지금도 그 훌륭한 녹음 결과를 통해 재현된다. 물론 바로 그 자본집약적 녹음 기술 미학이 있었기에, 록이 20세기의 대중음악이 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참 모순적이다. 록을 반드시 자본 친화적이라고만 매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음악인들이 록이라는 음악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 미학의 역사가 만들어 온 것과 반대 지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왓!의 『3』은 좋은 음반이다. 연주자로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연마한 결과-연주력도 훌륭하다. 또 록커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견지하는 태도도 칭찬 받아 마땅하다. 그 태도에 기인하여 밴드 스스로 앨범을 제작하는 자세에도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록 음반이 지금껏 견지해 온 녹음의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안타깝다. 누군가의 자본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록 음반의 역사가 만든 미학의 관점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혼자의 힘으로 그것을 이룩해 낸 아티스트의 음반(음악이 아니다!)을 만날 때, 우리는 기립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인디의 의미가 거대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아티스트 자주제작을 통해 태도와 음악적 자존심을 지키는 것에 있다면, 인디 록 음반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과감한 실험과 자기 투자, 노력으로, 자기만의 퀄리티 레코딩 노하우를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리라. 그 어려운 길을 가라고 밴드에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그것은 밴드가 가진 신념에 대한 자기 확신과 ‘다른 가치’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함께 할 때 가능해진다. 음반을 접한 나의 솔직한 심정은 가슴이 뜨거웠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긴 얘기 떠들 에너지를 준 밴드 왓!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 (20100308 헤비죠)              
       


★★★



● 수록곡
1. Hey Man
2. 미친 개들의 싸움
3. 갇혀버린 일상
4. 재앙
5. 슬픈 나무의 향기
6. 물고기의 입맞춤
7. Change
8. 두 얼굴
9. Panic
10. 지배공화국
11. 검은 그림자 



● 멤버
이상훈 - Lyric Messenger & Backer
신동현 - Drums
정세응 - Guitar
장민규 - Bass


 

● 앨범정보
Producer: Band What
Recording, Mixing Studio: Band What Studio
Mastering Studio: Band What Studio
Recording Engineer: 장민규
Mixing Engineer: Band What
Mastering: 장민규
Photo: Fans of Band What
Design Concept: Band What & 장윤수 (Violet-Moon.com)
Art Director: 장윤수 (Violet-Moon.com)

Posted by 헤비죠


한국 대중음악 공동체에 파랑새는 있는가?

이제 지겹기까지 한 ‘표절 논란’이 또 다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모양이다. 주인공은 인디 밴드 와이낫?(Ynot?)의 2008년 『Green Apple』EP에 실린 「파랑새」와 2010년 1월 발표된 씨앤블루(Cnblue)라는 신인 그룹의 『Bluetory』라는 미니 데뷔 앨범에 실린 「외톨이야」다. 내가 이 글에서 이 두 노래를 둘러싼 갈등을 ‘표절’이 아닌 ‘표절 논란’이라 기술한 까닭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페셔널 뮤지션-작곡가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표절에 대한 통상적 기준을 비껴가며 음악을 베낄 수 있는 사람들의 결과물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란 말이다. 방송윤리위원회라는 곳에서 정했다는 “같은 선율, 화음 4마디”, “비슷한 선율과 같은 화음 8마디”가 같다면 “표절”이라는 모호한 판정 기준은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든지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있는 정도의 규칙이다. 나아가 리듬까지 조금 조정해서 편곡을 하면 실상 프로페셔널 뮤지션 사이의 표절은 절대 증명해 낼 수 없는 ‘논란’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도 위 두 곡사이에는 ‘혐의’만 존재한다. 아마도 기술적으로는 누가 누구를 베꼈다는 결론은 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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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은 몇 마디를 어떻게 몰래 ‘베끼고’ 혹은 ‘(어쩌다 보니) 비슷하게 만들어지고’의 문제에 있지 않다. 이 사건의 본질은 이번 ‘표절 논란’을 통해 한국대중음악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음악을 만들고 듣는 사람들 상상 속에서라도 존재 가능한 공동체-하나의 문화이자 사회인가, 혹은 그저 공동체라는 허상을 통해 욕망을 착취하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가에 대한 판단의 기로에 서 있다는 데 있다.

우선 ‘표절’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브리테니커 사전에 의하면 표절이란 “다른 사람의 글을 취하여 자기가 쓴 것처럼 행세하는 행위”라고 한다. 음악에 대입시켜본다면 다른 사람의 음악을 몰래 가져다가 자기의 노래인양 발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타인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그 얘기도 맞다. 그러나 음악은 물론, 문학, 학문, 종교 교리 해석에 이르기까지 표절 문제를 소속 공동체가 중대한 범죄로 여기며 엄격하게 처벌하는 이유가 단지 지적 재산권이라는 눈앞의 돈과 관련된 문제일 뿐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나 표피적인 발상이다. 물론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돈은 개인에게 귀속되는 물(物)의 의미 뿐 아니라 같은 업(業)에 종사하는 공동체의 공익과 사회로부터 얻는 신뢰로써의 돈에 가깝다.

소설이나 영화를 두고 캐릭터 설정이나 모티브에 대해, 또 학계의 이론적 틀거리를 두고 표절 논란이 불거지면, 표절을 한 후자에게 엄한 처벌이 내려지게 마련이다. 표절 행위에 대해 벌하는 것은 단지 기존 연구/창작자가 먼저 발표된 설정이나 이론으로 벌어들일 돈을 표절자가 갈취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혀 주목 받지 못했던 선행 작품/이론을 표절자가 몇 가지 장치를 더하거나 일부를 변경하여, 또 표절 기준의 틀을 살짝 벗어나게 바꿔서 원작은 절대 얻지 못했던 상업적 성공이나 명성을 얻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원저자의 이익을 갈취한 것이 아니라도 표절은 단죄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글을 쓰고 연구하는 공동체 전체의 장기적 이익을 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학문 공동체가 나서서 기성 창작물을 무단으로 베끼는 것을 막는 것은 공동체 밖 사회로부터 공동체 구성원을 보호하고, 훗날 이 창작물(과 파생물)이 다시 조명을 받을 때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자신들의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지키는 수단이란 얘기다.

심지어 표절의 대상이 되었다 생각되는 먼저 나온 이론과 표절이라 추정된 결과물이 실은 베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먼저 발표된 글과 이론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도 비슷한 창작물이나 이론이 향후에 발표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후에 발표된 것은 표절로 간주되고, 대부분 공동체 내부의 심의를 통해 자진 삭제되거나 참고문헌이나 참고사항으로 선행 창작물/이론을 밝히도록 조치된다. 왜? 그것이 장기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제시하는 창작 공동체의 미래에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미처 몰랐더라도 먼저 발표된 자신의 것과 비슷한 모티브, 내러티브, 틀을 가진 창작물이 있음을 알게 되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과감히 인정해야 한다. 또한 창작을 하는 직업군에 새롭게 진입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공동체의 윤리 규칙에 대해 더 철저하게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 공동체의 윤리가 시작하는 사람의 몸에 배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음악의 창작활동과 위의 다른 창작, 연구행위를 꼭 같이 바라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음악도 인간이 만든 문화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다른 창작 공동체들, 문화가 적용하는 창작의 규범과 완전히 다른 잣대만으로 볼 수도 없다. 음악은 음악 공동체가 가진 창작 활동의 룰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다른 창작, 연구 공동체와 완벽하게 이질적인 것은 아니라 결론 질 수 있다.

12개의 음으로 이뤄진 서구의 음계를 가지고, 88개의 피아노 건반이나 24플렛의 기타를 통해 작곡되는 현대 대중음악에서 비슷한 음악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 또 누군가 먼저 작업한 곡을 듣고 영향을 받아 자신의 것에 비슷하게 녹여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행위가 엄청나게 잘못된 것도, 잘못한 것도 아니다. 다만 비슷한 음의 배치로 이뤄진 선행 창작곡이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이에 대해 공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힙합에서 샘플링한 곡을 밝히는 까닭은 단순히 ‘저작’료를 지불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음악에 영향을 준 앞선 음악인과 자신의 음악을 듣게 될 사람에 대한 예의고 배려다. 창작자로서 자신의 창작물이 존중받길 바란다면 우선 먼저 기발표된 다른 창작자의 창작물부터 존중하는 자세가 기본이다. 노래를 부르기만 했지, 곡은 타인이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상관없다는 태도는 저작권이라는 음악공동체 밖 사회가 정한 법의 문제다. 결국 노래를 부른 사람의 이름으로 이 창작물은 발표되기 마련이고, 그 순간 법과 조금 다른 공동체의 윤리와 논리-연주되고 불러진 노래는 1차적으로 가수의 것이라는-가 작동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가수가 기획사에 의해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진 경우라도 노래는 그 가수의 것이다.

대중-사회로부터 창작자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창작자 개인 못지않게(심지어는 개인보다) 창작자가 속한 공동체가 건실해야 한다. 공동체란 ‘동료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끈으로 연결된 공간이다. 손에 잡히는 실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상이라 단정할 수 없는 성격의 집단인 것이다. 반드시 무슨 협회가 존재하고 협회에 가입해야만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얘기다. 음악에 대한 공동체는 녹음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음악인은 물론 그 음악이 만들어지도록 도와주는 사람들, 나아가 그 음악을 (능동적으로) 듣는 사람들까지 포함할 수 있는 느슨한 집단이다. 서로에 대해 ‘동료’로 또 음악이라는 고리로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에겐 공동체의 일원으로의 권리와 책임이 부여된다. 공동체 안에 권력은 존재하지만 그 권력이 반드시 물질적 크기와 연결되지 않는다. 어떤 노래와 음악인에 대한 지지는 그를 둘러싼 경제적 자본과 관련이 있을 순 있지만 반드시 자본의 뒷받침이 커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15년 사이 한국 대중문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용어로 떠오른 ‘인디’는 인디펜던트(independent)의 약자이다. 이는 특정한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경제적 자본을 가진) 음악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음악인 스스로 자신의 음악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음반을 제작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창작에 개입하지 않는 제작사와 음악인이 공동으로 음반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인디’는 창작자로서 음악인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다. 물론 창작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중이 반드시 좋은 결과물-음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창작자 외부의 시선과 방향성 제시가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인디’가 언더그라운드/오버그라운드의 구분점도, 좋은/나쁜 음악을 가리는 기준도, 방송/비방송의 여부도, 상업/예술의 구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의 태도에 기인하는 다른 음악 제작 형태일 뿐이다.

음악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동료’로서 서로의 태도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아티스트의 존엄성에 방점을 두는 쪽과 상업적 성공을 중요시 하는 입장은 일치할 수도 있고, 서로 배척되는 지점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음악이라는 느슨한 공동체의 일원인 이상,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서로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창작자 공동체를 두고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장(場)이 바로 표절 논란이다. 외부에서 한 공동체의 건전성을 판단하고자할 때, 표절 여부를 가리는 내부의 기계적 기준은 중요치 않다. 표절에 대한 보다 명확한 기준과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문제는 표절에 대한 규칙이나 기준은 음악 공동체 내부의 합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음악 외부의 입장에서, 표절에 대한 규칙은 진리가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고, 그 기준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또 규칙이 강화 되어도 그 규칙의 법망을 빠져나갈 새로운 구멍은 반드시 생겨난다. 나아가 표절을 검증한다는 전문가 역시, 음악 공동체 내부의 누구일 수밖에 - 판사가 음악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규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고는 엄정해보이지만 논란을 해결하기보다 사건 후 불거질 분란의 앙금만 더 키울 가능성이 다분하다.

구성원 서로를 존중하는 공동체의 윤리가 살아있어 표절 논란의 혐의를 받는 작가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공동체 전체를 위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해결책이다. 논란 해결 과정에서 공동체성이 중요하게 고려된다는 사실을 외부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공동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밖-사회에서 이 공동체에 대해 지속적으로 믿음을 보내도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쓰레기들로 잠시 지켜보다 곧 버릴지 판단은, 몇 마디가 같으니 표절이네 아니네, 뉘앙스가 같으니 맞네 하는 내부 규칙의 왈가왈부가 아니라 표절 논란에 맞닥뜨린 공동체가 내부의 윤리로 매끄럽게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음악 공동체의 외부자인 한국 사회-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씨앤블루의 「외톨이야」를 두고 벌어진 표절 논란의 핵심은 표절 여부 판단 기준의 엄정함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번 논란은 한국의 대중음악을 만드는 집단이 음악을 건전하게 생산해 낼 수 있는 공동체인지, 또 다양한 가치 지향의 구성원들이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인지를 외부에 드러내놓는 지점에 놓여있다. 작금의 표절 논란과 관련하여 소속사나 작곡가가 보여준 몇 마디, 몇 개의 코드가 같고 다름을 내세우며 날을 세우는 발언과 행보는 한국 대중음악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공동체성과 내부 윤리라곤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행동이다. 논란만 커져가는 와중에 책임지는 이는 없고 적대감만 쌓이는 모습은 한국 대중음악 공동체를 바라보는 대중들로부터 냉소만 얻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선행 음악작업을 존중하는 건전한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마무리되기 바란다. 그렇지만, 구성원 사이의 이기심으로 공동체엔 상처만 남고 대중의 차가운 조롱만 얻는 결론이라도 별 수 없다. 모든 것의 상품화, 개개인 사이의 무한 경쟁으로 은폐된 차별적 진입 장벽, 주기적 위기 조작을 통한 개인의 고립과 사회 주변의 고착으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음악도 별 수 없다며 비관하면 끝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찌 생각해보면 지금 문제가 되는 표절이라는 행위 그 자체는 창피한 것도, 상도덕의 몰락도 아니지 않을까? 이번 논란에 대해 억울하다며 작곡자가 공개한 동영상처럼 의도치 않은 표절이나 비슷한 음이 그렇게 많은 것은 음악의 특성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표절 논란이 터질 때마다, 이미 발생한 논란을 얼마나 잘 해결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내부적 규범이나 공동체 윤리에 따라 원저작자에게 의도치 않았으나 피해를 줘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열린 자세로 상의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저작권료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을 하는 범공동체의 일원 사이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를 갖는다. 비의도적이건 의도적이건 표절을 둘러싸고 진정 상도덕의 몰락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다. 의도치 않은 표절 가능성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자기 곡을 표절 당했다는 그 (인디)가수 따윈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고, 이런 표절은 얼마든지 있어"라고 떠드는 인간이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이를 바라보는 음악 공동체 밖의 사람들 많은 수가 그 얘기를 듣게 된다는 데 있다.

파랑새-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것은 비인간적 극단의 시대에 나는 음악이라는 가장 비논리적이면서 가장 원초적 인간-문화적 형식과 그들의 공동체가 지켜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화 속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사회의 극단적인 상황이 답답하더라도 문화-인간사회를 버릴 수 없다.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의 입장에서, 비인간의 극단으로 치닫는 이 시대에 가장 인간적인 문화 구성물-음악(과 그 공동체)을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는 바람은 최소의 자구책이다. 내가 새로운 음반을 사고, 공연장을 찾으며 음악 공동체에 신뢰를 표하고,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음악 공동체가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논란이 된 음악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즐거워 할 것인가이다. 사람들이 「외톨이야」로, 와이낫의 「파랑새」를 듣고 행복하고 좋아한다면, 그들의 행복할 권리는 그 누구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뺐을 수 없는 것이다.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음악 울타리 밖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과 함께 있다.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음악공동체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그들의 음악을 듣는 대중은 똑똑하지 않다. 그러나 그 대중은 무식하지도 않다. 대중은 맥락과 상황에 반응한다. 또 그 대중은 하나가 아니다. 음악인의 눈에 대중이지만, 그 대중의 개개인은 음악계가 아닌 곳에서는 다른 전문가다. 그가 전문가 중 한명인 공동체의 눈에 음악인들은 다시 대중일 뿐이다. 그러한 대중이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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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음악취향Y 문화파괴 님


안타깝지만 인간에 의해 구성된 소리(음악)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이제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발가벗고 나서려 하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 공동체의 붕괴는 다른 동료의 작업을 무시하고 기술 좋게 베끼기도 하면서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자들에게는 희희낙락할 사건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이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 창작 음악의 존재를 위협하고 나아가 존재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짓거리가 될 것이다.

[음악취향Y의 대중음악 글쟁이 헤비죠, 조일동]


초고작성 :2010. 2. 11 (음악취향Y 게재)
수정: 2010. 2. 19




논의 전개를 위해 참고한 것들
블래킹, 존(채현경 역), 1998『인간은 얼마나 음악적인가』민음사.
앤더슨, 베네딕트(윤형숙 역), 2004『상상의 공동체』나남.
카츠, 마크(허진 역), 2006『소리를 잡아라』마티.
쿡, 니콜라스(장호연 역), 2004『음악이란 무엇인가』동문선.
하비, 데이비드(최병두 역), 2007『신자유주의-간략한 역사』한울.
Lysloff, Rene T. and Gay Jr, Leslie C. edited. 2003. Music and Technoculture. Wesleyan University Press.
Novak, David. 2006. Japan noise: Global media circulation and the transpacific circuits of experimental music. Ph. D dissertation. Columbi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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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Places, Large Issues: An Introduction to Social and Cultural Anthropology
[Second Editon]
Thomas Hylland Eriksen. 2001. Virginia: Pluto Press.

 

1. Introduction: Comparison and Context
2. A Brief History of Anthropology
3. Fieldwork and its Interpretation
4. The Social Person
5. Local Organisation
6. Person and Society
7. Kinship and Descent
8. Marriage and Alliance
9. Gender and Age
10. Social Hierarchies
11. Politics and Power
12. Exchange
13. Production and Technology
14. Religion and Ritual
15. Modes of Thought,
16. Challenge of Multiple Traditions
17. Ethnicity
18. The Politics of Identity: Nationalism and Minorities
18. The Global, the Local and the Global


   내가 진행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소개했던 외국의 문화인류학 개론서 입니다. 제목부터 매우 인류학적이죠? 하나의 작은 현장을 연구하더라도 그 현장에 대한 맥락적 이해와 공시적-통시적 접근을 통해, 그 현장이 속한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인류학의 시각을 그대로 적어놓은 듯한 제목입니다. 1995년에 나왔던 초판에 비해 개정판에는 계급, 정치, 글로벌리제이션 등에 대한 기술이 대폭 보강되었습니다. 이 책 전반부에 배치된 키워드들, 친족, 인성, 결혼 등은 인류학 초기의 관심사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주제는 인류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현대 인류학에서 이러한 주제가 과거에 비해 중요성이 덜 한 까닭은 과거 인류학자들이 가졌던 관심의 일부에는 <난혼-모계-부계>로 진화했다고 믿는 유럽-미국 중심적 사고방식이 깔려있었기 때문이죠. 진화도상의 맨 마지막 종착이 근대 유럽이기 때문에 다른 사회-문화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진화도식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가장 쉽고 간단히 확인 가능했던 부분이 바로 친족 구조, 결혼을 통한 결연 맺기 방식 등이었습니다.

  최근의 인류학은 더 이상, 앞서 밝힌 진화도식과 같은 단선적 진화론의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된 교류 속에서 누가 소외되고 차별 받는가, 또 국민국가라는 형태가 공고히 되면서 헤게모니를 빼았기게 된 수 많은 소수민족과 소수자들의 정체성 및 정체성에 연결된 정치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으로도 유명하고 저자가 출연하여 만든 다큐멘터리도 유명한 『총, 균, 쇠』에서도 잘 다뤄지고 있다시피, 현재 세계의 부가 불균등한 것은 어떤 문화, 어떤 종족-민족의 능력이 훌륭하거나 못해서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는 각 문화가 처한 환경적 요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전지구적 차원의 정치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맥락들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이런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긴 합니다만 개론서의 한계 때문에 매우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최소한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 그다지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사례들을 들어가며 인류학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이러한 목차로 구성된 인류학 개론서라면 역시 강의계획서에서도 소개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가 있겠군요. 글로벌리제이션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또 그 안에서 차별과 불평등이 당연하다고 믿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과연 그럴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매우 잘 쓰여진 인류학 개론서란 생각이 듭니다. (20090324 heavyjoe)



저자의 홈페이지: http://folk.uio.no/geir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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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for Humanity: A Concise Introduction to Cultural Anthropology [Sixth Editon]
Conrad Phillip Kottak. 2007. Boston: McGraw-Hill Humanities.


1. What Is Anthropology?
2. Ethics and Methods
3. Culture
4. Language and Communication
5. Making a Living
6. Political Systems
7. Families, Kinship, and Marriage
8. Gender
9. Religion
10. The World System and Colonialism
11. Ethnicity and Race
12. Applying Anthropology
13. Cultural Exchange and Survival


  『Mirror for Humanity: A Concise Introduction to Cultural Anthropology』는 미국 대학의 인류학과나 인류학 관련 개론 수업 교재의 새로운 고전으로 등극하고 있는 책입니다. 1996년 처음 출간된 이래, 벌써 6번째 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에 대한 인기와 저자의 성실함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몇 년 전, UCLA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던 후배를 통해 소개받아 살펴보았던 판은 1999년에 나왔던 첫 개정판(Second Edition)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인 2007년 개정판과는 목차의 제목, 내용 모두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인류학자의 사진과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쉽게 인류학을 접할 수 있게 한다는 기본 취지는 변함없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최근 인류학의 흐름인 글로벌리제이션과 변화, 변화 속 소외, 투쟁, 생존 등에 대한 내용이 보강되었습니다. 내가 진행하는 인류학 관련 교양수업들에서도 다루게 될 식민주의,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한 인류학의 입장과 접근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수업을 하거나, 따로 만나보면 많은 학생들이 '코스모폴리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미지로 보보스, 혹은 뉴요커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의 글로벌리제이션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도구로 생각하는 사회, 인간을 돈의 대체물로 보는 사회가 글로벌리제이션과 함께 움직입니다. 매 학기 상당수의 학생들이 자신은 그러한 세계의 변화하는 체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을 다루는(control) 위치로 갈 것이기 때문에 도구화되는 문제는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곤 합니다. 바로 그러한 사고 방식이 글로벌리제이션과 현대 자본주의가 널리 퍼뜨리는 헤게모니죠.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나는 내 옆의 동료들을 모두 누르고 저 위로 등극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사회문화적 안전망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언제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표방하는 경쟁의 논리 아래에는 이전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 소외와 환경 오염이라는 위험의 요소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위험요소를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의 패배라는 이름으로 덮고, 이에 대한 대비도 개인의 몫으로 돌려버리려 합니다. (왜 이렇게 최근 몇 년 사이에 각종 보험 상품이 이렇게 늘어났을까요?) 인류학의 시각으로 사회를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개개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촘촘히 살펴보고, 문제점은 없는지 고민해보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 책은 일상에 대한 관찰로부터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각을 확장하는 데 꽤나 좋은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소한 2nd Edition은 그랬습니다. 아마 후반부에 문화적 변화와 인간종의 생존을 다룬 챕터가 추가된 것으로 보아 6th Edition은 환경문제, 글로벌리제이션의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시각을 넓혀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학문을 하는 사람들, 특히 인류학과 같이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듣고 함께 행동하며 자료를 모으고 논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간과하게 쉬운 학문의 '윤리성'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간과할 수 없겠죠. 초판부터 윤리 문제가 첫 번째 장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 책이 다른 인류학 개론서보다 훨씬 성찰적이고 깊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나 역시도 한국어로 이러한 의미있는 인류학 개론서를 쓰기는 커녕, 번역조차 못 하고 있는 형편이긴 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아직도 인류학을 서양 학자가 남의 문화에 무턱대고 들어가서 몇 년 살고 나와서 지 멋대로 떠드는 것이라거나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타문화를 들추고 다니는 학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현대 인류학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학문적 태도와 접근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개론서가 있다고 소개하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20090324 heavyj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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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헤비죠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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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7월 16일 개성을 다녀왔습니다. 개성, 참 가까운 곳이더군요. 남북출입 사무소를 지나 DMZ 안에 나있는 도로를 5분도 달리지 않으니 어느새 북측 출입사무소, 수속 밟고보니 개성공단은 바로 여기에 붙어있고, 개성시내도 5분거리? 황진이께서 목욕을 하셨다는 박연폭포도 차로 30분 거리? 물론 교통체증도 없고, 길에 남측 관광단 말고는 아예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긴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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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2007년 가을 평양을 다녀온 경험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방문한 북한-개성의 시간과 공간은 느낌 자체가 상당히 다르더군요. 물론 함께 간 사람들 자체가 학생들인 것과 학자 및 시민운동가들의 모임인 게 다른 것도 한 원인이긴 하겠습니다만. 평양의 안내원들이 지금껏 만난 남측 인사 대부분이 일반 관광객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남측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여유 있으면서도 언제나 어떤 '선' 같은 게 있었습니다. 남한 사람을 10년 이상 만나온 안내원에겐 신참을 짝으로 붙이는 방식에서도 확신할 순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선'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남쪽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아무래도 평양을 찾는 사람들의 경우 기본적으로 '공무'나 어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밤에 만찬이 있으면 처음에는 함께 마구 마시다가도 술이 취할 즈음이 되면 안내원들은 살짝 사라지는 일도 빈번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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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에서 다르다고 느낀 원인의 하나가 바로 이 안내원들이고. 이들은 남쪽의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일반인과 접촉한 북측 인사들이라는 겁니다. 관광객들 중에는 맥주를 몇 박스 싸와서 가고 오는 버스 안에서 파티를 하는 단체 야유회 팀도 있고, 전세계 어디서나 자유인이신 강한(!) 한국(!?)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습니다. 금강산처럼 주변에 군사지역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양처럼 중요한 건물이 있지도 않은 개성 시내는 사실상 그다지 통제할 것이 없는 곳이기도 하죠. 500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괜히 한 명을 찍어서 사진 한 장, 한 장 뒤져서 시내를 찍은 사진을 지우라는 요청을 받았던 한 학생처럼 특별히 운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진 촬영도 별 문제가 없고. 그들 나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시내를 굳이 외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일반인을 북한 시민들이 전면적으로라도 만나는 것은 개성이 최초인 듯 싶습니다. 금강산처럼 고립된 섬(운전기사와 많은 인원을 북한 주민이 아닌 조선족 동포를 쓸 뿐 아니라 마을과도 완전히 경계지워진)이 아니기에 과도한 통제는 오히려 독이된다는 것을 체득적으로 느낀 것일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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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튼 북, 남측 사람들 모두 서로 상당히 많이 여유 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북측 일반 주민들과 관광객이 만날 상황은 통제가 되고 있기도 했고요. 현대아산 직원들과 북측 안내원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형-오빠-동생으로 부르는 사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안내원들에게 이런 저런 술을 마구 권하는 남측 아저씨들의 태도도 평양에서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합쳐져서 개성은 남과 북 사이의 차이를 잘 드러내면서도 공존에 대해서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빨리 변하는 북의 모습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함께 간 학생이 샀던 '들쭉 사이다'와 내가 마셨던 '귤탄산단물'의 포장을 보면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북쪽의 이런 모습들은 정말 빠르게 변화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그들이 어떻게 느낄 지, 앞으로 바라보는 것도 인류학자에겐 매우 중요한 현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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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변화하기 힘든 것도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느껴지더군요. 우리와 역사를 보는 시각과 인식이 다른 겁니다. 고려시대 노비의 가격, 그리고 농민항쟁 지역을 표시한 지도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왤까요? 이러한 농민 항쟁의 최종 결과물이 현재 북한 정권이라는 결론을 위한 포석이겠죠. 그럼에도 왜 봉건적인 고려의 왕과 장군이 중요한 것인지, 누구를 은유하고 있는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북한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라는 것은 절대적이지도 정답이 있을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역사는 상대적인 것이며 역사를 두고 우리는 각자의 관점과 맥락에 의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논란이 되었던 친일파 인명사전도 같은 맥락이죠. 남과 북, 어느쪽의 역사 인식이 옳다고 단정짓기 전에 무엇이 얼마나 다르고 어떻게 의미짓는가를 살피는 게 중요해 보입니다. 비교문화적 관점이란 이럴 때 작동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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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우리는 변화나 발전을 좋은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의 취향이란 것은 단번에 변하지 않습니다. 『굿바이 레닌』이라는 독일 영화를 보면 동독 시절의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 피클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어머니는 통일된 사실을 모르지요)와 그 어머니를 찾아온 사람들이 동독 시절을 재연하면서 다시 향수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색한 탄산수 유리병이 남쪽처럼 페트병으로 변한다고 사람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죠. 북한은 분명 변하고 있고, 변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변화를 주도하지 못한다면 남쪽의 우리보다 더 큰 변화에 따른 고통을 겪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을 조금이라도 부담 없이 넘길 수 있도록 인류학 같은 학문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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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점에서 버스를 타고 박연폭포로 이동하면서 보이던 풍경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은 산길을 따라 보이는 마을 입구마다 군인이 한 명씩 서 있다는 겁니다.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만) 물론 총을 들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복을 입고 마을 입구마다 부동자세로 서있죠. 왤까요? 함께 간 선생님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버스가 사고라도 나면 바로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랍니다. 역시 '선군정치'(!)죠? 북한군이 남쪽 관광객의 안전까지 책임지는, 모든 것의 선봉, 우선, 모범인 선군(先軍) 답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남측 관광객이 지나가는 시간에만 서 있을 것이란 겁니다. 즉, 남측 관광객과 북측 주민 모두에게 "여기까지"라는 무언의 암시를 주는 것이죠. 관광객에겐 여긴 남쪽이 아니라는 무언의 압력, 주민들에겐 괜히 자본주의에 찌든 저 놈들과 접촉할 생각 말라는 내용의.... 그런데 그렇게 막아도 어쩔 수 없는 변화는 누가 뭐래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선 인민의 나라에 담장이 쳐져있다는 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더 중요한 것은 그 담장 안과 밖이 다르다는 겁니다. 손으로 갈아 만든 밭에 심어져 있는 것은 옥수수와 콩 등 거칠고 많은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작물들입니다. 담장 안도 멀어서 옥수수만 확인되지만 그런 작물들이겠죠. 그런데 담장 안과 밖의 옥수수 크기가 확 눈에 들어옵니다. 담장 안은 아마도 그 집에 사는 사람의 것으로 허용되는 것이겠죠. 이제 막 무릎 높이 정도로 자란 들판의 옥수수와 달리 담장 안의 옥수수는 담장의 높이를 훨씬 넘어 자라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왜, 어떤 이유로 어디의 옥수수를 더 열심히 키우고 어느 곳의 옥수수는 그냥 자라도록 놔두는 것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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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완전 고용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당연히 실업자라는 개념이 없죠. 그리고 그 완전고용을 통해서 노동을 하는 대신 누구나 배급을 받아서 생활을 합니다. 물론 개성시내에서도 자주 눈에 띄는 '청량음료'집처럼 맥주집(개성에선 보지 못했지만 평양에선 저녁이 되면 다른 식당이나 가게는 한산한 반면, 청량음료집은 사람이 꽉꽉 차 있습니다)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는 것까지 배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평양에서 참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아침에 숙소를 나서면서 시작한 직경 1m도 안되는 아스팔트 땜질 공사에 7~8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있는데,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끝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당연히 일은 한, 두명이 돌아가며 하고, 나머지는 일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토론(?)을 위해 공사 현장 옆에 둘러 앉아 공사현장을 바라보며 있었죠. 사회주의적 방식입니다. 박연폭포를 오르는  길에 만나는 흰돌로 나무 주변을 둘러친 모습을 보면서 완전고용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놀라운 아이디어를 봤습니다. 자본주의가 새로운 소비의 욕망을 추동시키기 위해 별로 필요도 없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 떄, (뭔가 빠진 듯 느껴지는 북쪽식) 사회주의는 완전고용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별로 필요도 없는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죠. 근대적 노동 개념에 의거한 쌍둥이는 그렇게 남과 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기한 건, 바로 그 완전고용 속에서도 사람들이 자기 울 안의 옥수수는 더 열심히 키우고 있는 현실이겠죠? 단순히 자본주의가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사회가 모두 재단하여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의 헛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역으로 본다면 인간의 기본적 욕구도 자본이 통제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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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북에 대한 공포는, 남에 대한 북의 공포는 서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번에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출입사무국에 서 있는,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위해서는 모기에 물리지 않는 게 최선이란 간판..... 모기도 DMZ를 따라서 남북에 따로 산다고 믿는 것일까요? 북에서 남으로 돌아오면서(사진이 잘 나오진 않았지만) 버스 외부에 소독을 하는 모습이라니.... 사람들 한명씩은 왜 소독하지 않을까? 버스 외관엔 북의 무엇이 묻었기에 소독을 하나요? 아마 정말로 북의 어떤 질병이나 바이러스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을겁니다. 대신 하나의 상징적 통과의례 장치를 만든 것이죠. 이런 상징들이 물리적인 남과 북의 격리 상태를 더 공고히 시키는 장치는 아닐까요? 북쪽 안내원들은 일이 끝나고 남측 사람들이 떠나면 무엇을 할까요?


  마지막으로 소설 『1984』에 나오는 신어-이중언어에 대해... 북한 안내원들과 대화할 때 느껴지더군요. 분명 평양보다 훨씬 열려있지만 여전히 여기에도 이중언어의 사고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중언어에 대해서는 소설을 한 번 읽어보시길. 이건 북쪽 뿐 아니라 누구라도 신문이나 언론의 언사를 읽을 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특히 요즘같은 공안정국(?!)에는.  (20080723 heavyj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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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과 달리 조미료 맛이 거의 나지 않는 냉면은 맛있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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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年記』
다음기획/ 서울레코드, 2006


편견에 가려진 매끈함 

  각종 TV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아주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한국 남자들의 생각을 떠드는 "김C". 그리고 그가 속해있는 록 밴드 "뜨거운 감자".

  김C는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를 좋아하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TV에서 말하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록 밴드의 멤버다. 록을 하는 사람으로서, TV와 방송에서 들려주는 음악이 너무 단조롭다고 불만을 드러내는 것도 별 일 아니다. 그런데, 그런 김C에 대해 언론에서는 무슨 심오한 사람처럼 떠들어댄다. 물론 김C와 그의 회사에서 억지로 조장하는 면도 없잖아 보이긴 하지만. 난 김C를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희한하다.

  그리고 "뜨거운 감자"의 세번째 음반이 주는 느낌도 도 김C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과 같다. 매우 평범하고 기본이 잘 닦인 록 음악. 지난 음반에서 언 듯 비치던 날카로운 시선이 사그라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여전히 "하세가와 요오헤이"의 기타 연주는 센스 만점(「구름」, 「각설탕」의 연주를 주목하라!)이고 "손경호"(그는 이번 음반에서 처음 이 밴드에 참가했다)의 드럼 연주는 "원더 버드" 시절 못지않게 심플하고 군더더기 없는 리듬을 들려준다. "고범준"의 베이스는 좀 더 유연하고 나른해졌다. 음반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딱 맞게.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와도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요적(!)인 록 음악이다. 가요와 록을 나눈다는 것도 우습지만, 그럼에도 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만드는 음악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연주의 수준을 떠나서 이들의 곡 진행과 사운드 구성은 매우 쉽다. 밴드의 사운드가 귀에 들어오면서 머리에 그림이 다 그려진다. 그만큼 모든 악기들(목소리까지)의 소리는 어느 하나 쳐지지 않고(!) 자기 존재감이 살아있으면서 튀지 않는다. 그래서 이건 록이다. 김C의 보컬은 늘 그렇듯 자기 얘기를 자기 목소리로 풀어낸다.

  아주 평범하고 순진한 록 음반. 여기에 대고 ‘뜨거운 감자의 진실성이 사라졌네.’, ‘원래 걔들 별 거 없었네.’ 하며 평범하고 소박한 록 뮤지션을 영웅시하다가 죽이는 글이 별로 없었으면 좋겠다. 이들 원래 그랬으니까. 그리고 이 음반을 뭔가 많은 뜻과 깊은 의미를 내포한 심오한 음반인 것처럼 떠드는 언론들의 오바도 없었으면 좋겠다. 이들 록의 ‘슈퍼 에고(super-ego)’ 같은 거 아니니까.

  발매와 동시에 이 음반의 노래들에 대한 표절 얘기가 여기 저기 시끄럽다. “라디오 헤드(Radio Head)" 광팬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 정도 분위기 비슷한 게 다 표절이면 한국에서 '록' 딱지 들고 나온 음악은 모두 다 표절이란 생각이 든다. ‘8소절을 넘지 않으면 표절이 아니니...’ 하는 얘긴 하고 싶지 않다. 의도적으로 전 곡을 한, 두 음정 낮춘 표절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틀림없이 하세가와와 김C도 라디오 헤드를 좋아할 것이며, 자신들도 큭큭거리며 "인트로 느낌 제법 (라디오 헤드) 비슷하게 나는데?"하며 웃으며 녹음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TV 토크쇼에 나와서 별로 웃기지도 않는 얘기하고 있는 김C에 대한 한국 음악계의 편견 때문에 음악마저 버리기엔 너무 안타까울만큼 깔끔하다. 그만큼 내 귀에 이 음반은 수수하고 잘 다듬은 '록' 음반이다. 물론, 아무리 들어도 지난 2집처럼 가슴이 타들어가는 무언가를 남기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타 연주만 듣고 있어도 기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느끼게 만드는 기분 좋은 음반이다. 록의 절대 명반이 아니라 기분좋은 록 음반 말이다. (2006. 4. 16. heavyjoe)

★★★★

뜨거운 감자 홈페이지 http://cafe.daum.net/hotpotato

 

● 수록곡
01 Today is
02 봄바람 따라 간 여인
03 강변북로를 걷는 여자
04 좌절금지
05 101호 111호
06 청춘
07 구름
08 Perfect Loser
09 Question
10 미안해
11 각설탕
12 내가 날아간 자리


● 앨범정보
Executive Producer 김영준
Promotion manager 류상기
Promotion Manager 김영호 탁현민
Art Direction and Design by 홍나애


Produced by 뜨거운 감자
All Song by 뜨거운 감자 words by 김C
Arranged & Instrument by 뜨거운 감자
Additional Musician
  Kasuga "Hachi" Hirofumi(1st Track) E. A. Guitar
  Kang Saneh(6th Track) Chorus
Recorded by KimC with 뜨거운 감자 at NAVI studio 구종필 & 고종진 at KOCCA studio
Mixed by 오현석 at VIBE studio assisted by 정은경 except 3rd track mixed by 구종필 at KOCCA studio
Mastered by Tucky at JVC Mastering Center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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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위『Reason of dead bugs』
SINAWE Music/도레미미디어, 2006



록 이라는 이름의 바다로 떠난 시나위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음반 『시나위』(1986)를 발표하며,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라는 불멸(?)의 타이틀을 획득한(그러나 더 이상 헤비메탈을 하지 않는) 밴드, "시나위". 그들이 음반 데뷔 20년을 맞이한 2006년, 9번째 스튜디오 음반을 내놨다. 솔직히 "시나위"의 음악은 새로운 음반이 나올 때마다 그 음악이 어떤 것일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1~4집까지 시절의, 헤비메탈을 추구하던 "시나위"의 음악은 예상 가능하고, 그 예상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음악이었다는 것에는 시나위의  팬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1995년 밴드의 음악성을 그런지의 흐름에 맞춘 5집을 발매하면서 취향의 혼란은 시작되었다. "김바다" 시절(미니앨범, 6, 7집)의 원초적인 그런지에서 싸이키델릭한 음악으로의 변화, 그리고 8집에서 보여준 세련되고 안정된 그런지 성향의 하드록까지 이들의 음악은 멤버들 변화 만큼이나 꾸준히 달라져왔다.

  그리고 9번째 음반인 본작을 맞이하는 느낌은? 이제 시나위는 좀 더 열린 록 밴드로 변신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 얘기가 싸구려 감수성과 동급으로 읽혀지지 않길 바란다. 마흔이 넘은 밴드의 리더이지 브레인, "신대철"은 더 이상, 헤비 메탈, 그런지, 블루스 등과 같은 하나의 서브 장르에 얽힌 뮤지션의 수준이 아닌 것이다. 록, 굳이 말하자면 블루스 록부터 그런지에 이르는 록의 넓은 땅덩어리 여기 저기를 편안히 바라볼 수 있는 널직한 눈을 가진 기타리스트 신대철, 그리고 밴드 시나위를 만들고 싶어한다. 헤비 트랙이 음반 전체를 통해 두 곡(「모기지론」, 「슬픔은 잊어」)에 지나지 않으며, 처음 세 곡이 모두 기존 팬들에게 '허걱!'싶을 만큼 대중적인 친화성을 가진 곡으로 채워져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첫 곡 「날 잊지 말아줘」의 훵키한 연주는 시나위에게서 흔히 듣기 힘들던 성격의 연주이후 시나위(신대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드러머를 만난 것이 아닌가 싶다. 록의 바다 여기저기 자유롭게 손을 뻗는 신대철의 다양한 록 세계를 탄력적이면서도 자신있다 받아주는 리듬의 생산자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두 배터리가 오래 오래 시나위에서 계속 음악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생긴다.

  믹싱 과정에서 보컬이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도 놀라운 부분이다. 여기저기서 하도 떠들어대서 이제 지겹기까지한 "임재범", "김종서", "김성헌", "손성훈", "김바다", ("김용"도 난 정말 좋아했다) 등 한국 록의 내노라하는 보컬들이 모두 거쳐간 시나위지만, 늘 보컬의 위치는 밴드 음악에서 1/5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베이스 1/5, 드럼 1/5, 기타 2/5)과 비교한다면 신기할 정도다.

인데,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 시절부터 놀랍기 이를 데 없는 강약 조절 능력을 보여주던 드러머 "이동엽"의 연주가 이 곡부터 (마지막까지) 빛을 발한다. "신동현"   익숙한 풍의 슬로우 트랙인 「작은 날개」에서 들을 수 있는 보컬리스트 "강한"의 섬세한 감정과 같이, 이 음반에는 보컬의 작은 기교에 의한 표현이 많은 데,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도 보컬이 강조되어햐 했을 법 싶다. 시나위의 새 프론트맨 강한의 목소리는 시나위 역사상 가장 안(!) 강한 목소리다. 그러나 신보의 분위기와는 아주 잘 어울린다. 다만, 공연에서 옛 곡들, 특히 1~4집의 노래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 참 궁금하다. (하긴, 재결성 이후 시나위가 3, 4집의 노래를 연주하는 것을 아예 본 적이 없구나.) 그의 목소리는 하드 록 보컬리스트보다는 훵크 계열의 노래하면 더 잘 어울릴 듯하다. 그러나 록 밴드에 있어서 목소리가 다는 아니지 않은가.....!

  신대철의 기타는 간결함과 정통성에 방점이 있다. 특히 전반적인 기타 솔로에서 느껴지는 정통성은 신대철이 나서 자라던 시절 그에게 영향을 끼쳤던 아버지 "신중현"(본작에는 신중현의 대표곡「미인」의 리메이크도 들어있다)과 신중현 시기의 세계 록 음악의 감각이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고, 현대적으로 완벽하게 재해석 하고있다. 가장 빛나는 곡 중 하나인「Merry go round」와 같이 블루스에 기초하면서도, 늘어지지 않고 (오히려) 간결하지만 지속적인 반복과 변주로 청자를 사로잡는 그런 쫄깃한 기타 연주를 펼치고 있다. 지난 『D.O.A. Project』음반에서 공개되었던 연주곡 「뛰는 개가 행복하다」의 새로운 편곡은 테크닉이 아닌 감각에 방점이 찍혀 있기에 더 신선하다. 물론 부분 부분 '연주곡=테크닉'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벗지 못한 듯한 연주가 간혹 드러나는 부분이 아쉬움으로 다가오지만..... 더 이상 기교에 집착하느라 연주자의 느낌을 희생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연주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작은 날개」의 기타연주는 표절 논쟁에 휘싸일 여지가 있어보인다. 물론 신대철 본인이 「Little Wing」에 대한 오마주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듣기엔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의 노래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에게 바치는 곡인데....) 그러나 비슷한 분위기지만, 표절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 표절을 적용시키면 전 세계에 록 음악 하는 사람치고 표절 안한 사람 어디있을까? 특히나 기타로 만드는 음악, 그 스케일과 코드는 정해져 있다. 표절 논란과는 별도로 신대철 본인이 언급한「작은 날개」뿐 아니라「Merry go around」도 그렇고 신보에는 헨드릭스의 잔상이 많은 곡에서 느껴진다. 

  신대철의 기타는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예전부터 미국적인 록의 감수성이 늘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간간히 예외도 있었지만) 한국어 가사를 써왔고, 이제 한국말과 록 연주의 조화에 있어서 나름대로 경지에 이른 듯 하다. 가사란 것이 그냥 읽을 때보다 음악과 함께 들을 때, 가슴에 와 닿을 때, 성공한 것이라면, 신보의 「죽은 나무 part II」, 「Merry go round」나 「모기지론」 같은 곡은 가사가 곡과 함께 할 때 시너지 효과를 얻은 멋진 성과물이다.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 시나위는 부담감 대신, 편안함의 20주년을 맞았다. 개인적으로 신보의 곡들이 작곡, 연주, 녹음 모두 찌그러진 곳 없이 각 곡의 분위기를 잘 살려줘서 매우 흡족하다. 그런데, 48분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한 곡 정도는 피 흘리는 듯한 절절한 신대철의 기타가 살아있는 진한 헤비/하드 록 한 곡 쯤 있었으면싶은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것을 바라는 것은 메탈키드의 시기를 거쳤던 나만의 지나친 욕심일지? 신선하고 기분 좋게 음반이 끝났는데, CD를 꺼내고 나니 더 허전하다. 오늘만 몇 번을 돌려 들었는데도 뭔가 화끈한 한 방이 자꾸 그립다. 내 머리 속 "시나위"는 부글거리는 헤비메탈의 1986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2006.4.20. heavyjoe)


★★★★


시나위 홈페이지 www.sinawe.co.kr


● 수록곡
01 날 잊지 말아줘
02 작은 날개
03 가면
04 슬픔은 잊어
05 죽은나무 part II
06 Merry go round
07 모기지론
08 널 원하지 않아
09 미인
10 뛰는개가 행복하다


● 멤버
신대철 - Guitrs
강  한 - Vocals
이경한 - Bass
이동엽 - Drums


● 앨범정보
Produced by 신대철
Assistant Produced by Zakky
Enginerred by 은준형
Recorded and Mixed at Sovico Project Studio
Mastered by 하정수 at Sound Mirror Studio  


Posted by 헤비죠
  국제사면-인권위원회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날(Amnesty International)의 노마 강 무이코(Norma Kang Muico) 조사관이 오늘(2008. 7. 18) 한국의 '촛불집회'에서 발견된 인권침해 상황에 대한 보고(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했다. 한국정부는 경찰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한 적법한 수사와 처벌, 그리고 징집된 전경들이 시위현장으로 내몰리는 것에 대한 재고를 권고했다. 엠네스티의 권고는 강제성이 없는 것이기에 특별한 변화가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그다지 희망적인 의견을 내기는 힘들다. 18일 오전 국회에 출석한 한승수 총리가 물대포 사용을 '안전'한 진압장치라고 주장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향후 최루탄 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자세한 사항은 여기)고 한다. 이것이 2008년 한국이라는 나라의 일상화된 권력집단의 물리적 폭력이다.

  지난 10년간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폭력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게 아니다. 각 사업장, 재개발 마을, 거리 노점상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력은 지난 10년간 오히려 더 강화된 측면이 있었다. 폭력의 주체는 전경이 되기도 했지만 사업주와 용역관계를 맺는 폭력집단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동자가 없이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많게는 수십만의 시민들이 모인 시위가 경찰에 의해 전면적인 폭력으로 해산되는 사태는 15년 가까이 만에 처음이기에 놀라움과 두려움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무리해서 단순화 시켜보면 계약관계로 맺어져있다. 현대사회의 규모가 직접정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가-정부는 국민을 대리한다. 이 간단한 법칙은 사실 실상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신화를 꾸준히 생산한 발원지는 국민-시민이 아니라 이들을 통치하는 국가-정부이다. 폭력의 역사로 점철된 국민국가 200여년을 가리고 포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국민국가는 국민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들어진 신화'는 국민국가의 '헌법'을 통해 천명되고, '교육'을 통해 유포된다. 그런데 아주 가끔이지만 이 신화가 잠깐씩 현실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1987년이 그러했다. (지금의 촛불집회도 비슷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자) 쉽게 말해 만들어진 신화를 어느새 진실이라 믿는 사람들에 의해, 현실에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열망이 모여 신화가 현신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신화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인간의 힘이란 때로 신화도 현실로 살짝 현신하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신동엽 시인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말 할 때 그 하늘은 그렇게 잠시 만들어진 신화가 현실에 잠시 실현되는 그 때이다. 그 현신을 본 사람들이 얻는 상징적 힘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리고 그 신화의 거대한 물줄기는 어느새 다시금 시냇물만도 못한 크기로 작아져 스며들어버린다. 만들어진 신화도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는 정말 신화로 작동되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열망이 1987년 이후, 이렇게 더 급진적인 자본주의 사회로의 매진으로 바뀐 것, 혹은 2004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100만명의 촛불이 결국 2MB정권을 창출한 것 역시 배신이나 잘못된 굴절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이것이 신화(=국가는 국민에 의해 구성되고 만들어졌다)이기 때문이다. 워낙 신화라는 것의 작동원리가 그런 것이니까. (이에 대해서는 질베르트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이 좋은 방향성을 제시한다) 문제는 2008년 한국은 이런 신화조차 짓밟히고 부정당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신화를 만들고 퍼뜨린 권력이라는 장치가 신화를 믿게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들은 신화대신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국민과 국가의 계약을 통해 국민국가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매우 근대적인 발상이다. 정당성의 근원이 무오류의 어떤 '법칙'이 아닌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단서가 붙기 때문이다. 무오류의 법칙이란 신앙과 같다. 르네상스 시기가 근대의 미명이 될 지언정 근대라고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시간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근대는 계몽주의적 진보를 믿는 사회이며, 계몽주의의 바탕은 계약에 의한 사회구조를 담보한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과학이 신의 영역과 바톤 터치를 한 모양새를 갖는다. 즉 과학적 법칙이 밝혀지면 이 현상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원인은 물론 미래까지도 확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무오류성의 과학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비교문화적으로 바라보면 이러한 과학 맹신주의자나 종교 맹신주의자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다. 근대는 이 무오류성을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하려 한다. (이는 올드 패션드 맑시스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근대의 '계약'이라는 것도 만들어진 신화이며, 이는 일종의 전-근대 사회가 가졌던 무오류성의 무엇(신앙, 왕권, 무소불위의 과학)의 대치물이다. 탈/후기 근대에 이르러서 바로 이 계약도 무오류한 것이 아니라는 성찰성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무오류한 계약 자체를 의심하고 관계의 재설정에 대한 고민이 나타난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수자의 목소리가 중요해지게 되는 것도 계약의 무오류성이라는 믿음이 깨지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종교와 이해관계를 넘어선 인권의 중요성, 또는 인간 이외의 환경이 인간 못지 않게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 성찰적 깨달음에서 연유한다.  

  말이 좀 많이 돌았다. 이제 한국 사회로 다시 돌아와보자. 2008년 들어 수많은 토론 자리에서 듣게 되는 야당의 이야기; 속단하지 말고 믿고 따라와다오, 국민여러분 저를 믿고 맡겨주시시오, 겸허히 받아들이지만 지금은 위기니 지도력이 필요한 때, ..... 여기에는 계약의 기본이 되는 상호간의 검토나 건설적 토론의 틈이 들어설 수 없다. 믿고 따르라.... 믿고 따르면 되지, 왜 시비를 거냐, 심지어 좌파적 사고다. 좌파, 우파의 문제가 아니라 계약을 이행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계약 내용에 대한 재검토와 이행과정에 대한 검수가 필요한 법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정부는 계약이 아닌 무오류의 신앙을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자주 꺼내 놓는다. 그것이 모든 정권, 권력의 속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도가 지나치다. 한국의 '근대화'를 외치던 누구의 시대가 자꾸 떠오른다.

  시작에서 이야기한 엠네스티의 지적과 동시에 나오는 총리의 발언이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계약 진행사항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제3자의 감사가 이뤄질 때, 근대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계약은 다시금 돌아보고 점검하고 수정하고 진행하는 게 옳다. 하지만, 전근대적 신앙의 세계에서는 제3자의 말은 우리를 해하는 세력의 얘기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전근대적 사고로 무장된 사람들에게 엠네스티의 지적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도전이며, 받아들이기는 커녕 반드시 분쇄시켜야 할 악의 무리의 악의 발언이 된다.

  나는 근대 자체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 다만 근대가 작동되는 과정에 담긴 수많은 폭력과 억압이 문제이며 그 해결책은 근대의 여러 측면에 소소하지만 의미심장하게 담겨있다고 믿는 편이다. 근대는 여전히 역사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근대에서 진일보한 세계이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에겐 전근대적인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타협과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없애야 할 악으로 보인다. 문제는 무오류성의 확실성이 갖는 죽은 기운이다. 무오류한 과학은 미래를 완벽하게 예단한다. 여기에는 불확실성이 가지는 건강한 생명력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믿고 맡기면 모든 것은 다 잘되게 되어있다는 신앙심에는 불확실성이 들어가서도 안되고 허용되지도 않는다. 즉 무오류의 신앙은 도덕과 같은 권위를 획득하고, 이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계약은 불확실성의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재계약, 계약 수정, 나아가 계약 파기라는 불확실성이 작동할 수 있다. 신앙이 아닌 인문-사회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불확실성의 작동이 가져오는 역동적인 가능성을 연구하고 의미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회과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 2008년 사회계약이라는 신화를 책 속의 신화로 봉인하고 무오류의 신앙으로 대체하려는 정부와 사회계약 신화를 현실로 만들려는 시민들의 대립은 슬프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민주주의의 한 장면이다. 이를 한국의 문제로만 볼 것인지 혹은 더 큰 세계와의 연결점을 찾아 글로벌 시대의 시민의 문제로 만들 것인지는 시민들의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 전-근대로 회귀하려는 정부는 분명 시대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강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 홍수와 밀물을 만나 역류하는 순간을 맞이하더라도 그 잠시를 지나면 다시 흘러내리게 마련이다. 영구한 역류란 있을 수 없다.(2008. 7. 18. heavyj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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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lam 『...Who?』
Red Castle, 2006




그대 매력있어요. 그러나....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박용국"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탈퇴한 후, 새로운 파트너 "최수원"(기타, 베이스, 키보드, 보컬)과 듀오의 형태로 발매한 "더 글램"의 두 장짜리 신보 『...Who?』는 매끈한 포장만큼이나 매력적인 음악이 담겨있다. 두 장의 CD에 담긴 음악들은 기본적으로 1970년대 록에 뿌리를 대고 있으면서도 세련된 편곡과 사운드로 버무려져 있다. 이러한 부분은 지난 1집(2004)에서도 느낄 수 있던 더 글램의 특징이기도 하다. 


  박용국의 목소리는 한국 음악계에서 보기드문 "글램-록(glam-rock)" 취향이다. 적당히 끈적이며 비음이 섞인 목소리는 더 글램 개성의 절반을 차지한다. "노 웨이(No Way)"시절부터 오랜동안 록계에서 활동해온 그는 이번 음반에서 자신의 목소리 색깔을 잘 알고, 그 특징을 100% 활용하는 모습이다. 「바이러스」, 「Break On Through」, 「Rocker」와 같은 빠른 곡에서 그는 고음역대를 비음과 가성을 사용하여 노래한다. 덕분에 두성을 사용하는 보컬들처럼 날카로운 고음이 아니라 (약간 답답한 듯 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저음에서는 착착 감기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어, 90분간 음반을 듣더라도 질리지 않는 매력을 끊임없이 뿜어낸다. 간간히 보컬 이펙터를 사용(「Get Away」, 「Negative Smile」) 하거나 최수원의 보컬과 교대로 등장(「꿈」)하여 다양성을 추구하는 점도 귀에 들어온다. 청자의 입장에서 음반 전체를 가다듬고, 매만졌음이 느껴진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음악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본 음반이 1집과 확연히 차별되게 만드는 부분이다.


  연주 역시 무난하다. 특히 최수원의 베이스는 기타와 동등한 비율의 활약을 보인다. 지난 1집에서 전반적인 사운드가 소위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는데, 이는 믹싱의 문제도 있었지만 베이스와 기타 사이의 톤 조절에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런 과거와 비교할 때, 신보에서 베이스가 리듬기타 보다 더욱 긴밀한 움직임을 보이며 사운드의 핵으로 등장하지만, 기타와의 톤 조절에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작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밴드-더 글램을 증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기타 솔로가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대부분 멜로디와 테크닉을 적절히 혼합한 연주라는 점에서 더 글램이 추구하는 음악이 심플한 곡과 세련된 연주임을 알 수 있다. 화려하기보다 필요한 곳에서만 깔끔한 솔로 연주를 펼치는 기타 연주를 생각할 때, 리듬 파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이러한 분위기라면 드럼 역시 충분히 넓은 운신의 폭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드럼 연주가 베이스에 비해 다소 단조로운 느낌이다. 정식 멤버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더블 음반을 낼 만큼의 구성력을 가진 밴드라면 세션 드러머들과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CD에서는 두 곡의 연주곡과 한 곡의 기타 반주가 등장하는 발라드가 자리한다. 소품처럼 느껴지는 피아노 연주곡「무위」와 「JIA」는 따로 떼어 생각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들이다. 밴드가 지닌 음악적 저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굳이 이 곡이 음반 전체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1집의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녹음한 연주곡 「눈오는 밤 마지막 겨울」, 그리고 이어지는「미치도록 슬프게」에서도 의문은 계속 이어진다. 멜로우한 곡들이 두 번째 CD에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CD의 후반부로 갈수록 소품들 중심의 배치가 너무나 확연히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품을 서너곡 씩이나 집어넣은 구성의 더블 음반을 굳이 만들 필요가 있었으까? B-Side나 사이드 프로젝트 모음집로 '반드시' 두 장짜리 음반을 채워야 할 피치못할 사정을 가진 음반이었다면 이러한 곡들의 후반 배치는 별반 문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음반은 이들의 정규음반, 특히 1집에서 자신들의 저력을 제대로 다 보이지 못했기에 더욱 응축된 음악을 보여줄 필요성을 지닌 2집이다. 또한 본질적으로 더 글램이 추구하는 음악은 앞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날카롭기보다 매끄럽고, 뜨겁기보다 따뜻하고, 냉철하기보다 분열적이며, 복잡하기보다 단순하고, 단단하기보다 부드럽다. 그런데, 소품들의 남발은 이러한 밴드의 컨셉을 흐려놓기까지 한다. 과연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두 장의 CD에 담을 필요가 있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음반의 첫 곡인 「...Who?」가 음반 전체를 통해 가장 대곡이며 더 글램 음악의 정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곡과 함께 배치된 두 번째 CD의 모호한 성격의 곡들이 가지는 효용성에 대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감상에 이 음반은 지루하지 않지만, 반드시 두 장이어야 할 이유는 찾을 수 없는 음반이다. 충분히 매력있는 밴드가 너무 많은 것을 보이려다가 꾹꾹 눌러담은 만 못한 우를 범한 것 같아서 아쉬운 결과인 것이다. 1집에 비해 훨씬 나아진 2집이라는 것(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 자신감이 이러한 과욕으로 표출되었으리라. 과욕을 부릴만큼 밴드 스스로 자신들의 음악을 갈고 닦아왔음이 음반 곳곳에서 느껴진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음반의 완성도에 있어서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만, 특히 음악은 청자와 음악인의 호흡이 일치할 때 최상의 정점에 다다른다. 밴드는 치밀하고 조리있게 음반을 꽉 조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다음 번에는 정말 무르익고 잘 짜여진 음반을 선보일 것이라 믿고 싶다. 더 글램은 1집에 이어 이번에도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성을 확고하게 세웠을 뿐 아니라 이를 어떻게 심화-발전시켜야 하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밴드이기에 아쉬움은 더 커지고, 바램은 더 간절해진다.


  당신들 매력있어요. 충분히. 그렇다고 너무 다 보여주려고 하진 마세요. 그러지 않아도 우린 당신들이 하고픈 음악을, 그 얘기를 느낄 수 있거든요. [2006. 7. 23. heavyjoe]



★★★


더 글램 홈페이지 www.theglam.co.kr




● 수록곡
CD I
01 바이러스
02 Rock & Roll
03 Rocker
04 꿈 (Believ your dream)
05 Get Away
06 뒤늦은 사랑
07 내가 뒤집어 버리겠어
08 Can`t help falling in love
09 중독
10 회색빛 겨울
11 Rock & Roll (reprise)


CD II
01 Who
02 Break On Through (To the other side)
03 Negative Smile
04 무위
05 Shake Dance
06 JIA
07 깨어나
08 눈 오는 밤 마지막 겨울
09 미치도록 슬프게


● 멤버
박용국 - Lead Vocal, Guitr, Background Vocal
최수원 - Guitar, Bass, Keyboards, Vocal



● 앨범정보
Produced by 박용국
Co-Produced by 홍성태, 송재혁, 박호진, 최수원
Recorded by 송재혁 at Red Castle STudio
Mixing & Mastering 박호진 at Faunus Studio, U.S.A.
                   Geoff Ott at London Bridge Studio,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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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현 『안착』, 『도시학』

신나라, 2005



깨달음과 허탈함 사이


"신중현"이라는 이름이 전설이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어느 순간, 그는 전설이 되었다. 196,70년대 그의 작품이 담긴 LP는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는 고가의 상품이 되었고, 심심치 않게 신중현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도 방송 되었다. 그러나 이 '전설' 광풍 속에서 세상, 아니 신중현 자신 마저 '전설 신중현'을 상정하고 '전설'로 활동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나 의문이 든다. 1990년대 이후 신중현은「너와 나의 노래」와 같이 엄청나게 길고 웅장한 대곡을 완성하고자 하는 꿈을 꾸거나, 『김삿갓』과 같은 (좀체로 청자가 동화하기 힘든)장편을 내놓았었다는 것은 '전설'에 대한 강박을 드러내는 단적인 증거들이다. 사운드에 있어서 정말 뛰어났던『Body & Feel』역시도 이러한 '전설'에 화답하려는 "리얼뮤직"을 추구하는 '전설'의 일부였을 것이다.


2005년 내놓은 두 장의 음반 『안착』과 『도시학』을 들으며 처음 느껴지는 것은 '전설'에 대한 부담감을 벗어버린 노장의 음반이라는 점이다. 『안착』뒷면 그림처럼, 그저 기타 위에 앉아 자신의 음악 인생을 편안하게 되돌아보는 느낌이다. 그 편안함은 '세련됨'이나 '화려함'과 다른 종류의 것이다. 퍼즈와 디스토션이 섞인 톤의 기타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무게를 잃지 않는 거장의 손 동작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부클릿에 아무 것도 표기 되어있지 않지만 틀림없이 (이제는 문 닫은) "우드스탁" 스튜디오에서 신중현의 프로듀스, 레코딩, 믹싱, 마스터링(키보드 연주까지)을 거쳤으리라 생각되는 음반의 사운드는 아주 소박하다. 아무런 오버 더빙이 없는 음반들은 틀림없이 녹음도 몇 번의 풀 테이크(full-take) 중에서 하나씩 고른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는 신중현이 최근에 지향하던 "리얼 뮤직"과 같은 맥락이다. 여튼 그는 사운드에 부담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잼을 하듯 녹음했고, 자신이 생각하는 '느낌'이 잘 살아있는 테이크를 고른 듯 하다.  


음질을 떠나서 두 장의 음반을 지배하는 것은 정말로 잘 짜여진 멜로디다. 그의 기타 솔로는 화려하지 않지만 철저하게 자신만의 멜로디에 집착한다. 신중현이 '전설'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이상하게도 신중현에 대한 방점은 멜로디 메이커가 아니라 기타리스트로 옮겨갔다. 아마로 '최초의 록커'라고 신중현을 상정하고 보니, 작곡가/프로듀서로서의 신중현보다는 기타리스트 신중현이 더 추켜세우기 쉬웠기 때문이리라. 그가 처음 활약하던 1960년대 한국 음악계의 인적자원을 고려한다면 신중현은 분명 좋은 기타리스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신중현은 결코 테크닉이나 감각에 있어 최고의 기타리스트는 아니다. 대신, 그는 남들이 갖지 못하는 개성 넘치는 멜로디 라인을 뽑아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신중현이 '전설'이라면 포인트는 바로 거기에 맞춰져야 한다. 이미 검증이 끝난 히트곡들을 모아놓은『안착』뿐 아니라 『도시학』의 「우리 사이」나 「그대는 떠나도」, 「만나면」, 등 신곡에서 들을 수 있는 멜로디는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신중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개성과 그로 인한 빼어남이 묻어난다. 그의 멜로디는 무엇보다 꺽고 넘기는 기타와 보컬에 의해 만들어진다. 신중현의 보컬 능력을 떠나서 그가 만드는 보컬 멜로디 라인은 예전(김추자부터)부터 트로트와는 다른 독특한 꺽임과 울림이 있었다. 신중현의 기타를 평가한다면 보컬의 떨림과 꺽임을 기타로 재현하여 노래하듯 연주한다는 데 중점을 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중현 음악의 리듬 - 드럼과 베이스의 구성은 어떠한가? 놀랍게도 신중현 음악의 리듬은 순수한 록의 것이라기 보다는 텐션이 강한 펑키-록의 성격이 짙다. 즉, 흑인 음악의 감수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안착』과 『도시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두 음반을 위한 밴드의 리허설 과정에서부터 신중현은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직선적인 연주로 유명한 드러머인 "유상원"의 연주조차도 상당히 리듬 키핑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승한"의 드러밍에서는 더욱 심화되는데, 『도시학』의 분위기가 좀 더 블루지한 성격이 짙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베이스 라인 역시 철저하게 드럼과의 조화를 추구한다. 약간 더 직선적이고 호쾌함에 신경을 쓴 『안착』에서 베이스를 담당한 "신윤명"은 화려한 연주가 곳곳에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킥 드럼과의 호흡이 중심이다. 담담하면서도 도약하는 베이스 런이 곳곳에 숨어 있는데, 기타 솔로 시에는 단순한 리듬을 넘어서는 치밀한 베이스 라인이 귀에 들어온다. 연주 속에 감정이 실리는 것에 주안점을 둔 나머지 때로 불안한 신중현의 기타 톤과 연주를 안정되게 뒷받침하는 것도 베이스의 몫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타 연주가 좀 더 간결한 『도시학』에서 베이스를 담당한 "김재찬"의 연주가 신윤명에 비해 도약이 적고 함축된 리듬 살리기에 주력하는 것도 신중현의 의도를 십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두 음반이 절대적인 의미의 명반이라 할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거장', '전설'의 무게를 훌훌 털어버린 음악인 신중현의 솔직한 모습을 살펴보는 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음반을 듣는 사람들은 "신중현"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눌려 억지 칭찬을 꺼내거나 아예 실망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 이 음반은 음악적으로 놀랄 필요(지난 십 여년간 그를 짓누르던 '전설'을 완전히 털어버린 그의 깨달음에는 놀라지만)도, 실망할 필요도 없는 음반이다. 그저 신중현의, 신중현에 의한, 신중현 음악이다. 심하게 솔직하고 심하고 소탈한........


누군가 1960년대 후반 록 음악의 녹음은 아날로그였지만 록을 이해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힘이 제대로 살아있는 완벽한 연주와 녹음을 이뤄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글쎄, 이 음반을 들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들지는 모르겠디. 분명한 것은 녹음 상태를 떠나서 신중현의 음악은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타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만든 곡들도 여전히 개성있는 멜로디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깨달음을 얻고나서 세상과 소통할 필요가 있을까? 깨달음을 얻고도 세상 속에 몸을 담근채, 질투와 시기 속에서도 깨달음의 기쁨을 널리 알리려 했던 사람들(부처, 예수, 마호메트, 등등)이 그렇게 존경받는 것은 이치를 깨닫고 세상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도 세상과 소통하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박한 깨달음이 허탈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친 자신의 모습을 가식 없이 드러내는 용기일 것이다. 이 두 장의 음반이 나에게 던져주는 화두는 "깨달음과 허탈함 사이"에서 자신을 버리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은 채, 벌거벗은 자신을 용기있게 보이는, 작은 소통의 문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전설은 전설대로 남더라도, 역사의 평가는 이제 좀 더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치밀해져야 한다.

(2006. 7. 16)


『안착』   ★★★★

『도시학』 ★★★★☆


신중현 홈페이지 www.sjhmvd.com



● Track List


- 『안착』

01. 나는 너를

02. 바람

03. 봄비

04. 꽃잎

05. 미인

06. 미련

07. 빗속의 여인

08. 거짓말이야

09. 잊어야 한다면

10. 커피한잔


Guitar & Vocal - 신중현

Bass - 신윤명

Drum - 유상원



- 『도시학』

01. 내게로 와요

02. 우리 사이

03. 그대는 떠나도

04. 만나면

05. 내친구야

06. 그토록

07. 그미소

08. 기다려요

09. 그대는 떠나도(More)


Guitar & Vocal - 신중현

Bass - 김재찬

Drum - 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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